북한 주민의 인권개선과 북한 사회 민주주의

확산을 위한 탈북자유민 보고서

 

 

 

-차례 -

 

 

1.북한 사회 이해- 수령절대주의와 3대 세습

 

2. 북한 주민과 북한 정권을 구분하기 위한 전략

 

3.북한정권은 왜 핵 문제에 집착하는가

 

4.국제사회 대북지원의 문제점 및 개선책

 

5.왜 북한에서 중동 혁명 같은 민주화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가

 

6.북한 민주주의 확산을 위한 미디어 전략과 과제

 

7.북한의 인권유린 실태

 

8. 영국과 유럽이 북한 민주화에 기여하기 위한 현실적 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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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북한 사회 이해- 수령절대주의와 3대 세습

 

 

북한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인 1945년 8월 15일에 미국과 소련에 의해 일제의 식민지에서 해방 되였다.

38도 선을 중심으로 북에는 소련군이 주둔하고, 남에는 미군이 주둔하여 군정 정치를 펼쳤다.

소련군이 주둔한 북한은 스탈린 식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정책을 폈고 미군이 주둔한 남한에서는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실시했다.

 

조선식 민주주의라고 표방한 북한 국호에는 명색만 민주주의이고 실제 정치는 공산당의 독선을 앞세운 프롤레타리아 독재였으며 이 칼을 뽑아 든 김일성은 무산계급이 유산계급을 척결 해야 한다는 명분하에 수많은 사람들을 체포, 구금, 인민재판의 형식을 거쳐 마구 숙청했다.

 

최악의 봉건적 농업국가 형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북한주민들은 유산계급이 소유하고 있던 땅을 무상으로 공급받는다는 소리에 자신들이 억눌렸던 최대의 소원을 풀었다며 김일성의 정책을 의심해볼 여지도 없이 두손들어 환영했다.

 

당시 북한은 낙후한 농업국가였으며 국민의 80%이상이 농업에 종사했으며 그들의 절대다수의 지지를 얻자면 토지분배가 시급했다.

현실 정세를 정확히 판단한 김일성은 유산계급의 땅을 폭력으로 빼앗아 농민들에게 나눠줬고 그들은 김일성을 조선의 영웅으로 떠받들었다.

 

물론 이런 정책이 평생 개인적 소유를 누려보지 못했던 억울한 조선농민들한테는 유용한 정책임이 분명했지만 독재를 꿈꾸는 김일성의 장기집권의 사전 시나리오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당 시 한 명도 없었다.

 

자기 터 밭을 가지고 싶었던 남북한 사람들의 열망이 얼마나 대단했으면 일부이기는 하지만 남쪽 주민들도 그런 김일성의 토지개혁 정책을 동경하였으며, 이승만 정권(남한 대통령) 에 반대하여 목숨 걸고 시위를 했다.

 

5년간 실시한 ‘토지 개혁’을 통해 민심을 확보한 김일성은 남조선 해방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1950년 6.25일 한국 전쟁을 일으켰다.

어쩌면 해방 후 북한에서 실시한 토지개혁 정책은 5년 후에 벌어질 전쟁을 미리 예상하고 김일성이가 일부러 민심을 잡기 위한 사전 계획하에 진행된 일이었을 수도 있다.

 

전쟁 발발 후 북한군에 징병된 북한 주민들이 목숨을 걸고 전쟁에 참가했던 이유중의 하나가 그 무슨 위대한 사상에 감동 되어서가 아니라 평생 한번도 가져 본적이 없었던 내 땅을 원쑤 놈들에게 다시는 빼앗기지 않겠다는 오직 그 열망 하나였기에 가능했다고 전쟁참가자들은 훗날 회고했다.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이 정전이 된 후 북한은 전후 복구건설과 사회주의 건설 과도기 단계를 선포하고 주민들을 협력과 합동으로 국가건설을 해나가야 만이 살아나갈 수 있다고 선전, 선동해 나갔다.

전쟁을 통해 폐허가 된 잿더미 위에서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북한주민들은 김일성의 감언이설이 옳다고 믿고 자기가 가지고 있던 땅과 기업을 국가에 내 놓고 나라의 도움을 바랬다.

 

김일성은 이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집단적 소유제와 전 인민적 소유제라는 사회주의 계획경제, 생산분배 방법을 도입하여 협동농장이나 협동기업들에서 나오는 잉여가치를 국가가 관리하는 체계를 완비해 나갔다.

 

이런 과정에 적지 않은 반발도 있었지만 선전, 선동과 해설과 설복의 방법 즉 교육을 통해 거품을 제거해 나갔으며 이 방법도 통하지 않을 시 인민재판과 처형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김일성이 소련의 지지 하에 북한사회를 자신의 왕국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철저하게 내세웠던 노선이 바로 수령절대주의이다.

수령 절대주의는 북한에서 ‘김일성 주의’로 불러지며 나중에 그의 아들 김정일에 의해서 더 공고히 된다.

또한 이 수령절대주의는 세상이 잘 아는 북한식 김일성 종교인 ‘주체사상’과 세상이 잘 알지 못하는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 원칙과 같은 반인륜적 악법들이 더 포함이 되어 ‘김일성-김정일 주의’로 북한사회에 공표가 된다.

 

수령 절대주의는 북한인권유린의 최고봉이며 북한 주민들은 이 주의에 의해 정신 도덕적으로 억압당하고 있으며 이는 북한 사회에서는 헌법으로 담보하고 있다.

 

북한에서 주체사상연구소 소장, 김일성 종합대학 학장, 노동당 교육담당 비서, 국제비서를 역임한바 있는 황장엽 선생은 자신의 비망록에 수령절대주의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수령절대주의는 소련의 스탈린주의를 한층 더한 것이다.

스탈린주의의 수령독재론은 무산계급 독재에 관한 마르크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마르크스 자신은 수령의 개인숭배와 수령의 독재를 반대했지만 그의 무산계급 독재 사상은 결국 수령독재의 사상적 기초로 되였다.

 

마르크주의는 노동계급이 가장 선진계급이기 때문에 사회전체계급을 대표할 수 있는 대표계급이며 따라서 사회의 영도계급으로서 노동계급정권을 세우고 노동계급의 독재를 실시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중에 노동계급의 독재사상은 수령독재사상으로 전환 되였다.

노동계급의 독재론으로부터 나온 수령독재론은

노동계급은 가장선진적 계급으로서 온 사회와 전체인민의 이익을 대표하며, 공산당은 노동계급의 가장 선진 부대로써 노동계급의 이익을 대표하며, 수령은 가장 선진적인 탁월한 공산주의자로써 공산당의 이익을 대표한다.

그러므로 노동계급의 독재는 곧 공산당의 독재이며, 공산당의 독재는 곧 수령의 독재이다.

 

이리하여 소련 식 사회주의 하에서는 수령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개인 우상화가 대대적으로 진행 되였으며 수령은 절대적 권위를 지니고 종신독재자의 지위를 차지하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으로 되였다.

 

그러나 이러한 때에도 민주주의적 정치문화가 발전된 나라들에서는 수령의 개인독재사상이 대중에게 잘 접수가 되지 않았다.

 

예컨대 영국 공산당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스탈린의 개인숭배가 매우 강하고 개인독재가 여러 나에 유포가 되고 있을 때에도 영국에서는 의회 민주주의가 오랫동안 발전되어 온 전통을 무시 할 수 없다는 것을 근거로 내세우고 의회 민주주의를 이용하는 방침을 내놓았다.

그리고 스탈린도 영국공산당의 제의를 승인했던 것이다.

 

민주주의적 정치 문화 수순이 낮고 봉건 잔재가 많이 남아 있는 나라 일수록 수령에 대한 개인우상화가 더 강했으며 수령의 개인독재가 거침없이 실시 되였다.

 

이 점에서 봉건잔재가 가장 많이 남아 있던 북한에서는 처음부터 수령에 대한 개인 우상화가 그 어느 사회주의 나라보다 더 혹심하였으며 개인 독재가 더욱 강했다.

 

첫 시기에는 소련의 지배하에서 소련 식 독재체제를 그대로 모방하였기 때문에 북한의 독재체제는 소련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북한에서 개인우상화와 수령독재가 획기적으로 강화된 것은 1960년대 후반부터였다.

 

1950년 6.25 남북전쟁에 중국지원군이 참전하게 된 것을 계기로 김일성은 중국과 소련간의 모순을 이용하여 소련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하였으며 그 후 당내에 존재하고 있던 여러 반대파들을 숙청하고 1958년경에는 완전히 자기 파를 중심으로 하는 수령독재체제를 수립할 수 있었다.

 

1960년대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중국에서 일어난 문화대혁명을 김일성이 따라가지 않게 되자 중국은 김일성을 ‘수정주의자’라고 공격하였다.

 

이렇게 되자 김일성은 소련도 믿을 수 없고 중국도 믿을 수 없게 되였다면서 자체의 힘으로 남한을 해방하고 남북통일을 이룩할 결심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경제건설과 국방건설을 병진 시킬 데 대한 노선을 내걸고 군비확장과 전쟁준비에 큰 힘을 기울이게 되였다.

북한이 수령독재가 강화되던 시기에 중국보다 큰 잡음이 없이 수월하게 독재권력을 공고히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중국에는 모택동을 반대했던 강한 세력이 있었던 것과 달리 북한에서의 김일성을 반대하는 세력은 거의 자취를 감추고 있었던 만큼 북한의 문화 대혁명은 몇몇 인텔리들을 숙청하는 것으로 간단히 끝났다.

 

또한 이 시기에 김정일이가 대학을 졸업하고 당 중앙에 들어와 자기 삼촌 김영주와 권력다툼을 시작한 때이다.

두 사람 사이 경쟁의 초점은 누가 더 김일성을 신격화 하는가 하는 데서 앞장서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김일성 우상화는 종래의 소련 식 수령론의 테두리를 벗어나 수령절대주의로 전환하게 되였다.

북한의 수령절대주의가 스탈린 식 수령독재론과 구별되는 점은 어디에 있는가.

 

스탈린주의의 수령론은 한 마디로 말하여 수령이 전당과 전체 인민을 영도해야 한다는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노동계급이 가장 선진계급이기 때문에 전체 인민의 이익을 대표하여 전체인민을 영도할 자격이 있으며, 공산당은 노동계급의 선진 부대이기 때문에 노동계급의 이익을 대표하여 노동계급을 영도할 자격이 있고, 수령은 가장 탁월한 공산주의자이기 때문에 당의 이익을 대표하여 전 당을 영도할 자격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 논리에 따라 수령의 영도는 곧 공산당의 영도이고 노동계급의 영도로 되기 때문에 수령의 영도와 독재를 주장하는 것은 마르크주의 무산계급 독재 사상과 모순이 되지 않는다고 스탈린주의는 해석했다.

 

그러나 북한은 이 스탈린 수령독재론을 꺼꾸로 적용했다.

북한이 처음으로 창안한 수령절대주의는 노동계급과 인민대중을 출발점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수령이 출발점으로 되고 있다.

즉 수령의 영도가 있음으로 하여 공산당의 영도가 있을 수 있고, 공산당의 영도가 있음으로 하여 노동계급이 있을 수 있으며, 노동계급의 영도가 있음으로 하여 자주적인 인민대중(국가와 사회의 주인으로 살 수 있는 인민대중)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먼저 수령이 탄생하여 탁월한 혁명사상을 창시한 다음 이 사상을 실현하기 위해 수령의 당이 창건되고, 수령과 당의 영도 밑에 혁명적인 노동계급이 형성되며, 수령과 당의 영도 밑에 노동계급을 핵심으로 하는 혁명적인 인민대중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여 수령이 있고서야 공산당이 있을 수 있고, 수령이 있고서야 노동계급과 인민대중이 있을 수 있으며, 국가와 군대 등 모든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스탈린주의의 수령론에서는 수령독재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수령이 당과 노동계급을 위해 복무해야 한다는 사상이 남아 있다.

 

하지만 북한 독재자들은 수령절대주의에서는 수령이 인민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수령을 위해 인민이 존재하는 것처럼 완전히 본말을 뒤바꾼 주장을 펼쳤던 것이다.

 

스탈린주의의 수령론은 어디까지나 노동계급 독재의 필요성을 강조한 마르크주의 사상의 연장선에서 수령독재의 정당성과 불가피성을 설득하려 하였다. 따라서 수령은 언제나 혁명적 노동계급의 이름으로 독재를 실시하였다. 즉 수령의 명령지시는 수령개인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명령지시로 해석 되였다.

 

그러나 북한의 수령절대주의는 수령개인이 모든 것의 주인이 되였으며, 노동계급도 수령의 은덕으로 살아가는 존재, 수령을 운명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존재가 되였다.

 

북한 독재자들은 수령절대주의를 정당화 하기 위하여 아시아의 봉건적 유교사상인 충효사상을 이용하였다.

 

봉건적 충효사상은 부모가 있어야 자식이 있기 때문에 부모는 자식의 생명의 은인이고 주인이라는 사상으로부터 출발한다.

자식은 부모로부터 생명을 받은 것만큼 부모를 잘 모시는 것, 즉 효성을 다하는 것을 지상의 도덕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국가는 가족과 가족이 결합되어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며 모든 가족들의 으뜸가는 우두머리가 왕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왕은 모든 가족의 공동의 어버이가 되며 따라서 모든 가족들은 왕을 공동의 어버이로 모시고 자시식이 부모에게 효성을 다하는 것처럼 왕에게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 독재자들은 이와 같은 충효에 관한 봉건사상을 수령이 ‘인민의 사회 정치적 생명의 부모’라는 개념과 결부시켰다.

육체적 생명은 부모가 준다. 그러나 국가와 사회의 주인으로 살수 있는 생명인 사회정치적 생명은 부모가 주는 것이 아니라 수령이 준다.

 

그것은 수령의 영도가 있음으로 하여 당이 있고, 당의 영도가 있음으로 하여 인민정권이 있고, 인민정권이 있음으로 하여 모든 사람들이 국가와 사회의 주인으로 살수 있기 때문이다.

 

육체적 생명은 동물도 가지고 있다. 육체적 생명만 가지고는 국가와 사회의 주인으로 살수 없다. 국가와 사회의 주인으로 살수 있는 생명은 육체적 생명이 아니라 사회정치적 생명이며, 사회정치적 생명은 육체적 생명에 비할 바 없이 귀중하다. 따라서 사회정치적 생명을 준 수령은 육체적 생명을 준 부모에 비할 바 없이 위대하고 귀중한 어버이다.

 

모든 사람들은 수령을 가장 귀중한 생명을 준 어버이로 우러러 모시고 그에게 충성과 효성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수령은 누가 선출하는가

 

수령은 누가 선출하는 것이 아니라 인민이 추대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적 선거방법이 필요 없다는 강도 논리이다. 현재까지 이어지는 3대 세습이 이런 강도논리에 짜맞춰져 있다.

 

역사적 사실은 스탈린이 김일성을 북한의 통치자로 임명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 독재자들은 김일성이 14살 때인 1926년에 ‘타도제국주의동맹’을 창립하였고, 18세 때인 1930년에 주체사상을 창시하고 조선혁명이 나아갈 길을 밝혀주었기 때문에 조선인민이 자연히 그를 수령으로 추대하게 되였다는 것이다.

 

김정일의 경우에는 출생할 때부터 ‘광명성’이 탄생하였다고 사람들이 떠들면서 큰 나무껍질을 벗기고 그의 탄생을 축하하는 글을 썼으며 그를 김일성의 후계자로 추대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김정일은 북한군 최고사령관으로 된 것도 추대 형식이었으며, 국방위원회 위원장이 된 것도 민주주의 선거 방법이 아닌 추대 형식에 맞춘 것이다.

 

또한 북한 독재자들은 수령후계의 논리로 ‘혁명은 대를 이어 계속 이어져야한다’면서 수령의 집안에서 수령이 나오면 대를 이어 수령을 해야 한다는 논리를 만들어내 북한 주민들에게 평생 세뇌시켜 왔다.

즉 아버지가 농민이면 아들도 농민이 되어야 하고, 아버지가 기관사이면 아들도 기관사가 되어야 하며 아버지가 수령이면 아들도 수령이 되어 혁명을 계속해야 한다는 평생 세습의 논리를 만들어 낸 것이 김정일이다.

 

김정은의 3대세습도 그런 맥락에서 의심의 여지 없이 실현 되는 국가가 바로 북한이다. 아버지가 수령이기 때문에 아들도 수령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북한 세습의 논리인 것이다.

 

수령은 인민이 선출하는 것이 아니고 인민으로 하여금 수령을 추대하도록 만든다는 논리에 따르면 수령은 인민에게 복무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를 베풀고 인민은 수령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결론만 나오게 된다.

그리하여 수령은 당과 국가와 인민의 위에 있는 신성불가침한 존재로 되고, 인민의 운명을 개척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으로 규정 되였다.

 

북한 독재자들의 표현에 따르면, 수령은 혁명과 건설에 절대적 지위를 차지하며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또 수령에 대한 충성은 당에 대한 충성, 노동계급에 대한 충성, 인민에 대한 충성의 최고표현이며 수령에게 몸과 마음을 바치는 것은 최고의 도덕이라는 것이다.

 

이런 황당한 궤변을 북한독재정권은 인민들에게 세뇌시키고 있으며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해 전혀 모르는 일반 인민대중은 곧이 곧 대로 믿고 맹목적으로 충성과 효성을 다하는 사회가 바로 북한이다.

 

북한의 황해도 일부 주민들이 김일성의 분신처럼 나온 김정은의 모습을 보고 수령님이 환생했다고 감격해서 울었다는 에피소드만 봐도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수령을 자기운명의 주인, 자기 사회 정치적 생명체의 어버이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죽도록 충성해야만 한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