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국가에서 살아 본 사람만이 자유의 참맛을 안다. 나는 40여년을 북한에서 살았고, 독재국가에서 살다가 대한민국에 입국한 2만여 탈북자들처럼 행운아중의 한사람이다. 우리 탈북자들은 독재와 박해 속에서 살아 보았기에 대한민국의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해 늘 감사하며 살아간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이 말들은 대한민국에 입국한 탈북자들이 하나같이 쑥스러워 하며 어렵게 배운 말들이다. 북한에서 “고맙습니다”란 말은 김일성이나 김정일을 향한 점유물처럼 일반화 되지 않은 말이다. 더구나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란 말은 더욱 그렇다.

나는 북한에서 인민무력부 산하에서 무역을 하다가, 정확히는 외화벌이를 하다가 자유의 품으로 찾아 왔다. 북한에서는 외화벌이는 ‘교화벌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돈은 벌지만 결과가 안 좋다는 말이다.

그러한 ‘교화벌이’를 시작해서 탈북 할 때까지 내가 알고 지내던 외화벌이 사람들 중 얼마나 총살되고 감옥에 갔는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그 중에는 정말 법을 어기거나 외화를 착복해서 처형된 사람들도 있지만 사실은 대부분이 김정일의 지시나 간부들과의 알력관계로 모함을 당한 사람들이다.

북한에서 외화벌이가 전국적 전분야적 범위에서 활성화되기 시작한 것은 김일성의 죽음으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국고가 텅 비었다는 이유에서이다. 하지만 김정일은 김일성을 안치하기 위해 금수산기념궁전에 8억 달러 이상을 쏟아 부었다.

김정일은 김일성의 죽음을 이용하여 3년간이나 애도기간으로 정하고 일체 가정들에서 결혼식이나 망년회(송년회)를 비롯한 사적인 모임을 가질 수 없도록 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상갓집에서도 곡(哭)을 하지 못하게 했다.

식량공급은 아예 끊긴지 오래고 일을 해도 월급은 나오지도 않았다. 하지만 북한주민들은 “장군님만 믿으라”는 지시대로 앉아서 기다리다가 1994년부터 1997년 사이 수백만 명이나 굶어죽었다.

당시 평양시에서 생활하던 나는 북한의 식량난이 이 정도인줄은 모르고 있었다.

어느 날 평양시 용성구역에 위치한 국방과학원에 다니는 사촌동생이 우리 집에 놀러 왔다가 과학자들이 굶어죽는다는 소리를 전하는 것이었다.

“과학자들까지 굶어죽을 정도면 우리나라는 이미 망한 것이나 다름이 없구나” 아마도 그런 생각이 나를 그 위험하다는 외화벌이에 끌어들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때로부터 얼마 후, 나는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산하 외화벌이 회사에서 일했다.

당시 인민군 안에는 물론 국가안전보위부, 인민보안성(당시 사회안전부), 정무원의 각 부서들에서 저마끔 외화벌이 회사들을 만들었었는데 몇 백 개가 생겼다가 반년도 되지 않아 또 몇 백개가 사라지군 했다.

외화벌이 품목은 각이했는데 농수산물부터 광석, 유색금속, 심지어 석탄까지 그야말로 돈(외화)이 안 되는 것이 없었다. 이것들을 중국이나 일본에 팔아 식량으로 바꿔와 다시 되거래를 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외화를 번다고 해서 누구나 다 잘되는 것은 아니다. 빽이 없는 회사들은 생긴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빚만 잔뜩 짊어지고 파산한다. 그것도 파산에만 그치면 다행이다. 국가재산 탐오낭비로 걸리면 시범껨(본보기)으로 처벌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외화를 잘 벌어 계획을 해도 문제다. 번 돈을 100% 바친다면 모르지만 모든 운영을 무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운영자금 역시 번 돈에서 충당해야 했다. 몇 년 지나서 회사가 잘되면 또 검열이라는 굴레를 씌어 어떤 명목을 만들어서라도 반듯이 잡아넣고야 마는 것이 북한 당국자들의 관습이었다.

나도 농수산물로부터 시작해서 철광, 선철, 석탄, 중고차 장사까지 해보지 않은 게 없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석탄수출이었다. 평안남도 순천시에 있는 직동탄광의 탄이 그중 칼로리가 높아 중국회사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기에 적격이었다.

석탄을 수출하자면 우선 수출허가를 받아야 하고 화물방통을 받아야 한다. 거기에다 석탄을 선불로 사야 하기 때문에 밑천도 만만치 않게 들었다. 우리 회사는 총정치국 산하였기 때문에 국방위원회 명령분으로 석탄과 화차를 받는데 거칠 것이 없었다.

원래 석탄 1톤당 중국에 파는 가격은 46불, 말단회사까지 오면 1톤당 15불 정도에 거래된다. 직동탄광에서는 1톤당 5불에 판매했고 화차 한 방통에 100불이었다. 대체로 견인기 하나에 120톤짜리 10개의 화차를 단다고 보면 석탄 1200톤에 6천불, 화차 10개에 1천불, 도합 7천불의 자금이 있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돈이 없는 회사들은 (북한에서 7천불은 일반 사람들이 평생을 뼈 빠지게 일해도 손에 만져도 볼 수 없는 거금이다.) 화차 한두 개를 다른 회사들 편에 붙여 따라 보낸다.

당시 우리는 한 번에 견인기 4~5대를 동원해 수출을 하다 보니 1년 동안에 번 돈이 100만 달러가 훨씬 넘게 되었다. 다른 회사들이 1톤당 15불을 받을 때 30불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국가의 에네르기(에너지)를 팔아먹는 것은 반역행위라는 김정일의 지시가 내려왔고 석탄수출은 중단되었다. 남의 돈을 엄청 끌어들여 석탄을 사놓고 신의주 국경을 넘기지 못했던 회사들은 졸지에 망할 처지에 빠져버렸다.

나도 마지막 탕에 20만 달러가 넘는 손해를 보았다. 하지만 7만 달러의 빚 때문에 자살까지 한 어느 외화벌이 회사(새날회사)의 부사장에 비하면 약과였다. 당시 신의주역에는 수출이 막힌 수많은 석탄화차가 몇 달 동안 조차장에 밀려있었고 그로 인해(화차가 모자라) 철도운행이 마비되기까지 했었다.

이것은 북한 외화벌이의 일부분일 뿐이다. 농수산물, 철광, 중고차 등 어느 것 하나 마음 놓고 외화벌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돈이 좀 벌어진다 싶으면 김정일의 지시로 수출금지 명령이 내려오곤 했다.

그 때문이랄까. 당시 내가 얻은 결론은 어떤 것이든지 2년을 넘기지 말고 아무리 돈이 잘 벌어지는 것이라 해도 업종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업종을 바꾸면서 나름대로는 공화국의 발전과 내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아글타글 노력해온 나였지만 결국은 ‘교화벌이’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1990년대 말, 일본산 중고차(폐차형식으로 된 차량)들을 대당 800~1500불에 들여와서 중국에 3000~5000불에 되파는 일을 했었는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중고차를 통한 무역이라는 북한식 외화벌이로 짭짭한 수익을 올리고 있었는데 덜커덕 김정일의 중단 지시가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국내에 들여온 중고차들은 모두 두만강을 통한 밀수 형식으로 중국에 팔려나갔다. 일이 잘 될 때에는 눈을 감아주지만 일단 걸리기만 하면 처형되는 것이 밀수이고 내가 그 중심에 서있었던 것이다.

결과는 불 보듯 뻔 한 일이었지만 당시로서는 이것저것 잴 형편이 아니었다. 이름 하여(내가 속해있던) 총 정치국으로부터 받은 당적 과업에 떠밀려 일본산 자동차들은 줄을 지어 중국으로 밀수되었고 결국 관련자 모두가 재판석에 서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다.

호위사령부 문화기재관리국 산하 신의주 기지장 방영남, 호위사령부 광명성회사의 김국명, 국가안전보위부 산하 신흥회사 조성훈, 사회안전부 산하 록산회사의 김영철, 체육위원회 산하 붉은별회사 장호영 등 수십 명이 체포되었고 사형수로 전락했다.

이들과 함께 하루아침에 ‘죄인’으로 전락한 나에겐 어떤 희망도 미래도 없었으며 그곳이 고향이라고 붙들고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날 이후로 오로지 탈출의 기회만을 노리던 나에게 드디어 때가 왔던 그날을 잊을 수 없다.

……

체포와 또 한 번 총살될 위기를 넘기며 2005년, 나는 대한민국에 입국했고 지금은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다. 이처럼 대한민국을 위해 흙 한 삽, 벽돌 한 장 옮긴 적 없이 무작정 서울을 찾아온 나를 친 자식처럼 맞아준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들을 향해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가 늘 고민이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란 이야기가 때 없이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2011년 5월 김철수